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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世紀少年의 울트라리스크/이학림

패션왕에게 필요한 것은 책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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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학림 스트리트캐주얼 ‘FLUX’ 디렉터 (haklim.lee77@gmail.com) | 작성일 2020년 08월 31일 URL 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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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2010년대 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지인이 필자가 좋아할 것 같다면서 웹툰 하나를 추천했다. 제목은 ‘패션왕’. 

 

패션을 주제로 한 웹툰이라면서 분명히 좋아할 것이라고 했다. 웹툰에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패션을 주제로 했다고 하니 재미있을 것 같아 읽기 시작했는데, 대략 7편정도 읽은 후에 역겨움과 불쾌함에 읽기를 때려치웠던 기억이 있다. 

 

야자와 아이(Yazawa Ai) 

패션을 주제로 한 만화는 많지 않다. 일본 작가 야자와 아이(Yazawa Ai)의 대표작인 나나(Nana), 파라다이스 키스, 내 남자친구 이야기 등에서는 설정 자체를 패션 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으로 잡거나, 패션 디자이너의 이야기를 담기도 하고,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의 빈티지 컬렉션 의상을 그대로 주인공이 입고 등장하기도 한다. 만화가가 되기 전 패션 관련 공부를 했던 전적(?)을 살려 훌륭하게 패션을 스토리에 녹여낸 경우가 있기는 하다.

 

만화가가 되지 않았다면 스타일리스트와 같은 패션업 종사자가 됐을 것이라는 본인의 말처럼, 그녀의 작품 속에서 패션은 항상 대단히 중요한 소재로 그려진다. 

 

한 때 ‘패션’이 한창 세간의 이슈이던 시절에 그녀의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을 정도로 야자와 아이가 패션을 대하는 태도에는 언제나 (때로는 필요 이상의) 존경과 진지함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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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작가 야자와 아이(Yazawa Ai)의 대표작인 나나(Nana)​>

 

 

기안84 논란

 

‘패션왕’의 작가 기안84(본명 김희민)의 태도가 논란이다. 연재 중인 웹툰의 한 에피소드 속 여성은 시종일관 전형적인 무능한 직원의 모습을 보인다. 배에 조개를 올려놓고 돌로 쪼개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나타내는가 하면, 마치 그녀가 무능함에도 상사와의 잠자리를 통해 입사했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기도 한다. 

 

이후 논란이 커지자 작가는 공식적인 사과문과 함께 문제가 되는 장면을 수정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문제는 이 작가의 이런 논란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이전에도 여성혐오, 장애인 비하, 이주 노동자 차별 등 수많은 논란을 야기했던 인물이다. 즉, 이번에 문제가 된 장면들 역시 순간적인 실수라기보다는, 애초부터 작가가 의도했던 그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패션왕’을 보면서 필자가 느낀 역겨움과 불쾌함이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인가를 생각했던 적이 있다. 이 만화의 내용은, 패션에 전혀 관심이 없던 모범생 주인공이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패션왕으로 거듭나면서 진정한 패션왕이 되기 위해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 발생하는 에피소드들을 담고 있다고 한다(앞서 밝혔듯이 필자는 역겨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웹툰을 보다가 말았기 때문에 줄거리는 외부 자료를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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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이된 기안84 웹툰 장면> 

 

혐오의 문화

표면적으로는 나름대로 참신하고 뻔해 보이기도 하는 전형적인 학생물이지만, 그 안에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해당 작가의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그대로 담겨있다. 

 

이 만화에서 ‘패션’이 상징하는 것은 당시의 기안84라는 아웃사이더가 결코 넘볼 수 없던 ‘주류 문화’ 그 자체를 상징한다. 결국 ‘패션왕’은, 비주류가 주류를 뒤집어엎고 주류가 된 이후에 엉망진창이 되어서 제멋대로 돌아가는 세상을 보여준다.

 

문제는, 작가는 패션에 대해 아무런 이해나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단순히 주류 문화를 부수고 세상을 뒤집어엎는 것까지만 생각하고 있을 뿐, 그 이후에 대한 아무런 대안을 고려해본 적이 없다는데 있다. 

 

아마 이 작가는 ‘패션’을 단순히 ‘파격적이고 기존의 발상을 뒤엎는’ 정도로만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 만화에서 제시되는 ‘하이패션’이란, 단순히 ‘패션 테러’로 일컬어지는 저급한 것들을 재평가하는 식으로만 그려진다. 아마도 꼼 데 가르송이나 가레스 퓨, 월터 반 베이렌동크 등의 런웨이를 보면서 ‘저런 것이 하이패션이다’라는 식으로 기계적인 학습에 그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 만화는 비주류로서의 자격지심이나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주류 문화에 대한 조롱과 비아냥거림으로 가득하다. 즉 ‘패션’에 대한 혐오와 몰이해가 빚어낸 총체적인 난국을 ‘패션왕’이라는 언어로 그려낸 것이 이 만화이며, 그런 작가의 태도는 이번 논란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필자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좋아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다른 영화들과 다른 지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영화를 보는 내내 느껴지는 불쾌함과 고통이었다. 수많은 잔인한 영화들과는 급이 다른, 현실적으로 아픈 감정과 불쾌함을 넘어서는 역겨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김기덕 감독만이 할 수 있는 묘한 능력이라고 생각했었다. 

 

적어도 그의 영화들은 만들어진 가상체험이 아니라 실제로 배우들을 고통스럽게 착취하면서 만든 ‘진짜 고통’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직접 느꼈던 그 불쾌함이 진짜 불쾌함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다시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다만 2003년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라는 영화에서 감독은 특유의 염세적이고 회의적인 세계관 대신, 시적이고 아름다운 여유를 그려낸다. 물론 곳곳에 김기덕 감독만의 냄새가 나는 표현들이 담겨있기는 하지만, 이 영화에서만큼은 모든 증오의 감성들을 승화시키는 것에 집중했던 모양이다. 

기안84의 논란을 보면서 이 영화가 떠올랐다. 

 

김기덕 감독의 인간으로서의 잘못된 언행과 자질문제와는 별개로, 그의 감독으로서의 천재성을 부인할 수는 없듯이, 기안84 역시 그의 뒤틀린 태도와는 별개로, 작가로서 그만이 보여준 천재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본인이 원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는 이미 주류 문화의 중심에 서있는 인물이며, 그 자리에 올라선 순간부터 그에게는 지금까지는 필요하지 않았던 책임감과 사명감이 주어진다는 깨달음이지 않을까. ​ 

경력사항

  • 現 ) 스트리트캐주얼 ‘FLUX’ director
  • 前 ) 서울패션위크 Generation Next Seoul 참가
  • 前 ) 20th Century Forgotten Boy Band 디자이너
  • 前 ) Parsons the New School For Design, Men's wear B.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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