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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으로 세상보기/박세진

비일상의 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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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세진 패션칼럼니스트 (macrostars@gmail.com) | 작성일 2021년 01월 11일 URL 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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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은 보통 비일상을 모사한다. 아마도 그게 실용이고 기능적이며 일상적인 옷과 가장 다른 점이다. 이러한 비일상은 이상적, 환상적 혹은 이국적인 소재 등 여러 가지에서 찾아낼 수 있다. 

 

예를 들어 명품 패션의 초창기 시절에는 고대 이집트의 장식, 아즈텍 문명, 동양 미술, 기모노의 바이어스 컷 등 새롭게 알게 된 기묘하고 이국적인 아이템을 중심으로 패션을 선도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주변에서 볼 수 없었던 뭔지 모를 낯선 비일상의 패션을 통해 호기심이 발현되고 자극을 받아 알지 못했던 감각을 일깨우며 새로운 방식의 패션 미감을 발견한다.

 

하이패션의 시작과 변화

초창기 샤넬의 접근 방식도 비슷한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샤넬은 평범한 사람들이 운동복과 속옷으로 많이 사용하던 저지로 드레스를 만들고, 군복에서 영감을 얻어 여성복을 만들었다. 또 플라스틱의 일종인 베이클라이트와 루사이트로 만든 쥬얼리를 내놓기도 했다. 

 

같은 도시에 살고 있고 같은 재료를 사용해 만든 옷이라고 해도 생활 방식이 분리돼 있는 이상, 옷의 양식은 공유되기가 어렵다. 평범한 사람들이 착용한 속옷의 저지와 상류층 귀부인이 입고 있는 드레스의 저지는 다를 수밖에 없다.

 

한쪽에서는 미감이 제거된 실용성만을, 다른 쪽에서는 낯선 패션의 감각을 제공하는 소재로 각각의 세계에서 전혀 다른 역할을 하기 마련이다. 하이패션이 이렇게 분리된 세계를 넘나들며 이국적인 미감을 제시했던 시절은 끝났다. 교통이 발전하고 계층이 무너지면서 상당히 다른 면모를 갖게 됐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무리 지어 오토바이를 타는 갱스터 집단, 그것을 모티브로 세상에 불만을 표현하는 펑크 족, 다시 이것을 패션으로 받아들여 찢어지고 스터드가 박힌 레더 재킷을 입은 트렌디한 패션 피플과 고급 패션 디자이너, 여기에 펑크가 뭔지는 모르지만 그런 모티브의 패션을 즐겨 입는 뮤지션의 팬덤 까지 패션은 서로 얽히게 된다. 

 

오서독스한(orthodox, 정통적인·정통파의) 근본주의를 추구하는 이들은 펑크의 정신도 모르면서 찢어진 레더 재킷에 옷핀을 박아 놨다고 조소를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하이패션 브랜드의 라벨이 붙어 있는 밀리터리풍 피쉬테일 재킷을 입은 이들은 펑크의 전복적 태도조차 패션으로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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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페이스X구찌.>

 

기능성과 럭셔리의 만남

계층과 기능을 넘나들며 자기 자리를 만들어 가는 흥미로운 브랜드들이 있다. 최근에 나온 협업 컬렉션 중에 노스페이스와 구찌의 협업이 그렇다. 

노스페이스와 구찌처럼 각각의 정통과 가는 길이 전혀 달라 보이는 브랜드들의 협업은 최근 자주 볼 수 있다. 이 협업은 캠핑, 마운티니어링 같은 아웃도어를 모티브로 아웃도어 패션을 모사하고 있다. 

 

디자인의 기반은 노스페이스가 70년대에 내놓은 제품들이고 거기에 하이패션 특유의 고급스럽고 섬세한 마무리를 더했다. 특히 다양한 색감과 복잡한 로고 패턴이 인상적인데 아웃도어 기능성이 특유의 무뚝뚝한 분위기를 탈피하면서 레트로 트렌드가 합쳐진 결과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컬렉션은 위에서 본 분리에 기반을 둔 하이 패션의 자리 잡기와는 다른 형식을 가지고 있다. 기능성이 이미 패션의 일부분으로 포함됐기 때문이다. 

 

튼튼한 합성 소재에 마운틴 파카, 패딩, 커버올, 등산 부츠, 마운틴 백팩 등으로 이뤄진 컬렉션은 단지 모양만 가져온 것이 아니다. 사실 그랬다면 노스페이스라는 아웃도어 브랜드의 이름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이 같은 형식는 최근 나온 아크테릭스와 팰리스의 협업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옷은 흉내내기용이 아니다. 정말 산을 오를 수 있고, 추위를 막으며 캠핑을 할 수도 있다. 분리된 계층을 기반으로 하고 있던 하이패션의 사용자가 뒤섞이면서 그러한 분리로 설 자리를 만들어 내는 방식은 의미가 없게 됐다. 그러면서도 이 협업은 묘하게 선을 그어 놓고 있다.

 

자연광이 눈부신 산 위에서 아웃도어 옷을 입고 있지만 나풀거리는 긴 치마, 얇은 끈의 샌들, 로퍼, 핸드백, 무거워 보이는 액세서리가 함께 뒤섞여 있다. 원한다면 산을 오를 수 있겠지만 거길 가라고 만들어 진 패션이 아니다. 거친 자연의 극복이라기보다는 자연과 그 자리에 어울리는 옷이 배경을 이루어 새로운 패션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런 식으로 기능과 럭셔리 사이에 특수한 자리를 만들어 낸다.

 

뒤섞임의 미학

최근 내놓은 로에베와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토토로와의 캡슐 컬렉션도 재미있다. 이 컬렉션에 포함된 노랑, 파랑, 그레이의 아기자기한 소품은 이전에 토토로 숍 같은 곳에서 볼 수 있을 법한 비닐 가방에 들어있는, 애니메이션 프린트가 입혀진 굿즈와 생긴 모습에서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이 컬렉션은 고급 가죽으로 만든 가방과 지갑에 손으로 가죽을 잘라 붙여 그림을 그려 넣었다. 

 

이런 모사는 예전에 나왔던 청바지나 군복을 정밀하게 복각하고, 그러다 보니 실제 제품이 있더라도 훨씬 비싸진 레플리카 브랜드의 제품들을 떠오르게 한다. 한때 평범한 일상복, 작업복이었던 옷을 그대로 만들어 내기 위해 이제는 희소해져서 마구 쓰기엔 비싼 기술과 소재가 총동원되고, 사라진 것들을 통으로 다시 제작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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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다르긴 하지만 대량 생산된 애니메이션 굿즈가 장인의 손길이 들어가 있는 고급품으로 재탄생하는 과정 역시 비슷한 노력이 들어가 있다. 상업적으로 봤을 때는 약간 더 복잡한 면이 드러난다. 이 제품이 누군가에게 추억을 소환할 수도 있다. 또 단지 귀엽고 다른 진중한 고급 가방에서 볼 수 없는 유니크한 면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부모와 함께 백화점을 지나가던 어린이 고객을 유혹할 수도 있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하이패션의 소비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계층과 나이, 나라와 문화가 뒤섞이면서 분리와 유입에 의한 하이패션의 방식이 다른 면모를 갖게 됐다는 사실이다. 어떤 착장은 사회적, 정치적 태도에 의해 구성되고 또한 어떤 착장은 디자인과 핏의 조합으로 구성된다. 이것들은 모두 그 배경에 놓인 태도와 이유까지 합쳐진다. 

 

형식만 가져오는 것은 이제 의미가 없고 심지어 위험할 때도 있다. 만약 뭔가를 가져올 생각이 있다면 그 뒤에 놓여있는 것들도 함께 가져와야 한다. 가끔 그것을 놓치는 바람에 종교적, 민족적 상징들을 함부로 채용했다가 논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복잡 미묘함 속에서 패션 브랜드들은 노하우를 만들어 가고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며 자신만의 자리를 구축해 가고 있다.​ 

경력사항

  • 패션칼럼니스트
  • 패션붑(fashionboop.com) 운영.
  • 現 한국일보 패션 칼럼니스트
  • 2018년 ‘레플리카’ 저서
  • 2016년 ‘패션 vs 패션’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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