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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재원 패션 저널리스트 (fpost@fpost.co.kr) | 작성일 2019년 12월 04일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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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국내 유일 패션디자이너 출신 

패션평론가 허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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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추계 서울패션위크를 앞둔 어느 날, 허준 선생의 전화를 받았다. 이번에 총감독이 바뀌었다는데, 관련해서 이런 저런 궁금증과 의견을 전한다. 오래간만에 하는 통화지만 패션계 동향에 민감한 ‘패션평론가’로서의 면모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해준다. 

 

필자가 패션기자 초년병 시절에 허준 선생은 패션평론가가 아니라 디자이너였다. 남산 밑 퍼시픽호텔 왼쪽 길에 ‘크리에이터 허준’ 본사 사무실이 있었고, 80년대 초중반의 디자이너 허준은 가죽옷으로 특히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어느 날 사무실에 들른 필자가 “강북지역에서 ‘크리에이터 허준’ 복제품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던데요?”라고 하자 “놔 둬, 한두 군데도 아니야” 하면서 오히려 빙긋이 웃었다. 

 

디자인 복제문제는 오늘날에도 심심치 않게 문제가 되고 있지만 80년대엔 그야말로 적발해도 규제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그렇게 인기 있던 디자이너가 80년대 후반부터는 패션평론가로 변신하여 날카로운 필봉을 날리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유일한 패션디자이너 출신 패션평론가인 허준 선생을 인터뷰하기 위해 11월6일과 13일, 선생이 자주 다니는 광화문 시네큐브 옆 카페에서 만났다. 

 

허준 선생은 까마득한 대학 선배이기도해서 사석에서는 필자에게 편하게 말을 놓는다. 30년도 넘는 기간 동안 지켜보면서 ‘허준’ 하면 떠오르는 장면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제일 강렬한 인상은 신장이 작아도 얼마든지 멋쟁이가 될 수 있다는 본보기로서다. 

 

다양한 스타일의 의상에 다양한 모자와 안경, 네크웨어, 그리고 신발과 액세서리까지 언제나 허투루 넘겨볼 수 없는 차림새여서 만날 때마다 찬찬히 살펴보게 만드는 분이다. 

 

중학교 입학할 때 훗날 ‘한국 패션계의 대모’로 불리는 최경자 선생이 만들어준 교복을 입었다고 해서 깜짝 놀라기도 했는데, 허준 선생이 어떻게 해서 일찍부터 패션에 눈뜨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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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가 앙드레김 등과 함께 국제복장학원 1기생이었다. 누나는 연극과 오페라를 좋아했고 양장점을 직접 운영하기도 해서 그 누나에게 제일 영향을 많이 받았다.” 

 

5남2녀 중 둘째였던 허준 선생의 아버지는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인텔리로 일제 식민지 시절에 이미 턱시도를 갖춰 입을 줄 아는 멋쟁이였다. 메리야스공장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영향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6·25 때 피난 가서도 집안 정원에 국제규격 탁구대를 놓고 지냈을 만큼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대구 피난 시절에 연합고사를 통해 서울 용산중학교에 지망했는데, 그때 서문시장에서 양재를 하던 최경자 선생이 미군 장교복을 해체 후 복원해서 교복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탤런트 양택조가 허 선생과 초등 및 용산 중고등학교를 같이 다닌 동기동창생이라고 한다. 

 

누나와 아버지 영향으로 패션에 일찍 눈떠

고려대 철학과로 입학한 허준 선생은 합창부와 현악부(바이올린)에서 활동하며 연극을 좋아하는 예술지향 학생이었다. 

 

2년 연상의 누나 영향으로 패션에 관심을 갖게 되고 슈후노도모, 맥콜 등 일본과 미국 유럽의 여성잡지와 패턴지까지 보면서 패션에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1969년, 명동 중앙극장 옆 2층에 ‘듀엣(Duet)’이라는 살롱을 열고 본격적으로 패션 디자이너로 활동하게 된다.

 

- 80년대엔 ‘크리에이터 허준’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상호는 언제 어떤 이유로 변경했는지?

 

“1975년 명동의 미즈백화점에 입점해 기성복을 시작하면서부터 ‘크리에이터 허준’으로 바꾸었는데 좀 건방진 작명이었지(웃음). 당시 미즈백화점엔 나 이외에 김희, 김희자, 조세핀조 등이 입점했었고 입점 디자이너들 중심으로 ‘서울컬렉션’이란 이름을 처음 사용하면서 연 2회 패션쇼를 개최할 정도로 열정이 대단했던 시절이었어.”

 

정명훈 가족이 운영하던 미즈백화점은 명동 국립극장 앞에 있던, 당시로서는 최고급 백화점이었다. 롯데백화점이 등장하기 이전에 미도파백화점과 함께 쌍벽을 이루고 있었고 미도파엔 디자이너 이신우, 트로아조, 강숙희, 한계석 등이 입점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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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단 카탈로그용 의상(모델 유지인,70년대 중반)>

 

70년대와 80년대 중반까지 국내 최대 규모의 패션쇼는 ‘목화쇼’였다. 미국에서 면직물의 수출 진흥을 위해 매년 ‘목화 아가씨’를 선발해 전 세계 순회쇼를 하는데, 그 일환으로 한국에서도 해마다 목화쇼가 열렸다. 

 

처음엔 노라노, 김비함 등 디자이너 단독 쇼 형태로 열리다가 학원들(오리엔탈, 국제)과 대한패션디자이너협회 쇼를 거쳐 허준 중심의 미즈백화점 입점 디자이너들이 3년 연속 맡아서 목화쇼를 발표하기도 했다.

 

목화쇼에 참여하는 디자이너들은 모델료와 원단지원은 물론 ‘작품료’까지 충분하게 받았다. 패션 디자이너들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던 시절이어서 디자이너들은 목화쇼에 참여하는 것에 대단한 긍지를 느꼈다고 한다. 

 

목화쇼처럼 국제행사의 일환인 패션쇼인데도 명동국립극장이 대관을 안 해줘서 대한극장에서 하기도 했고, 나중엔 상공부에서 관심을 가져서 시민회관이나 문화체육관에서 열 수 있었다고 한다.

 

허준 선생은, 비록 오랫동안 계속되진 못했지만 국내에서 처음으로 ‘서울컬렉션’을 매년 2회씩 개최하고, 광고 의상을 최초로 시도한 것들을 패션 디자이너 시절의 보람으로 꼽았다. 

 

디자이너들에게 무서운 존재였던 ‘패션평론가 허준’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패션쇼를 하면 해설자가 출품작의 디자인 특징과 소재 등을 모델들이 출연할 때마다 설명해주곤 했다고 한다. MBC 아나운서 출신의 정흥숙 교수(중앙대 의류학과)가 주로 패션쇼 해설을 맡았는데, 허준 선생도 목화쇼와 안느마리베레타, 겐조 등의 국내 초청 패션쇼 해설을 맡기도 했다. 

 

이때의 해설 경험 덕분에 TV에서 패션을 설명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 ‘허준’을 찾는 빈도가 잦아졌고, 개인 숍을 정리한 뒤에 본격적으로 패션평론가의 길을 걷게 된다.

 

- 패션 디자이너에서 패션평론가로 전환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무엇인가?


“고교 후배가 감독을 맡았던 영화의 의상을 담당한 적이 있다. 그런데 영화판에서 패션 디자이너는 심부름꾼 취급을 받더라. 내가 감독의 학교 선배였음에도 불구하고 촬영장에서는 “야, 너, 이리와 봐” 식으로 막 대하는 걸 보면서 화도 나고, 디자이너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든 개선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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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동양극단 연극의상 담당 시절 작품(모델 여운계,70년대)>

 

"문학 쪽은 말할 것도 없고 대중음악이나 영화분야에도 평론가가 있는데 패션 쪽엔 없었다. 신문사의 문화부 기자들이 간혹 패션관련 글을 쓰기도 했지만, 패션평론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없을 때여서 평론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패션 디자이너 출신이 패션평론을 하면 디자이너들과 옷의 깊은 내용까지 속속들이 잘 아니까 유리한 점이 많았겠다고 하자, “비평의 대상들이 모두 선후배 아니면 동료들이어서 오히려 건드리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기억하는 ‘패션평론가 허준’은 디자이너들에게 매우 무서운 존재였다. 80년대와 90년대 초반만 해도 패션전문지가 한두 개에 불과해 패션을 비평할 수 있는 저널리스트가 매우 드문 시절이었다. 

 

팩트를 취재해서 기사화하는 저널리스트는 있었지만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능력까지 갖춘 저널리스트가 극히 드물던 시절에, 패션평론가 허준은 동료는 물론 선배와 후배 디자이너들의 작품에 대해 날카로운 지적을 주저하지 않았다. 

 

패션평론가 허준 비평의 핵심은 한마디로 ‘정직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지적’이라 할 수 있다. 

 

파리컬렉션에 어찌어찌해서 관객으로 참관했으면서 컬렉션에 참가한 것처럼 ‘사기 친다’든지, 외국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을 베껴 버젓이 자기 작품인 양 발표하는 것을 보면 참지 못했다. 

 

때로는 비판이 너무 지나쳐 매체에서 기고문을 아예 실어주지 않은 경우도 있었고, 개인적으로는 인간관계가 끊어진 경우도 있다고 한다.

 

패션평론가로서 허준 선생의 업적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는 외래어나 잘못 사용되고 있는 패션용어를 제대로 된 우리말로 고치는 작업이었다. 예컨대 일본식 표현이었던 곤색을 감색으로 바꾼 것이나, 개량한복을 생활한복으로 바꾼 것들이 그 대표적 사례다. 일간지에 ‘(패션용어의) 우리말 되찾기’를 일 년 동안 연재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일간지나 월간지에 ‘한국패션 40년사’를 연재하는 등 한국 패션산업의 뿌리 찾기 작업에서도 남다른 업적을 남겼다. 패션평론가로서 그가 남긴 저서만 해도 <복식디자인의 원리> <파리모드 200년> <프랑스 명화, 그 패션의 향기>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크리스티앙 디오르> <패션속으로> <눈썹의 역사> 등이 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평론활동을 제대로 못했다’고 자평한다. 평론활동보다는 ‘다리 놓는 역할’을 더 많이 한 것 같다고. 다리 놓는 역할이란, 모델 발굴이라든지 디자이너에게 맞는 패션기업을 연결시켜주는 일들을 말한다. 

 

사실 패션평론은 패션 저널리즘이 발달해야 더불어 발달하는 것이고, 패션 저널리즘은 패션산업이 발달해야 더불어 발달하는 것이다. 

 

허준 선생이 평론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80년대와 90년대,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서도 패션전문 매체들은 늘어났지만 대부분 프랑스와 미국 등지의 라이선스 잡지들이어서 비평기능보다는 트렌드와 브랜드를 소개하는 기능에 치중해온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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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운맥주 광고의상 (1978)>

 

그러니까 허준 선생이 ‘평론활동을 제대로 못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개인이 자책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패션산업과 패션저널리즘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국패션의 미래, 소재개발에 달렸다 

패션계 입문으로 따지면 허준 선생은 올해가 데뷔 50주년이다. 그중 20년은 패션 디자이너로서, 나머지 기간은 패션평론가로서 활동해온 그이기에 한국패션에 대한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평가가 궁금하다.

 

- 한국패션의 과거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는지?


“너무 급급했다. 컬렉션이 뭔지도 모르고…. 너무 편협했던 우물안 개구리 시절이었다고 생각한다.”

 

허준 선생은 1988년 국제패션디자인연구원 출강을 시작으로 한성대, 동덕여대, 중앙대, 세종대, 경희대 등에서 2014년까지 학부와 석박사 과정에서 오랫동안 강의를 해오기도 했다. 

 

그는 패션교육은 조기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빠르면 중학생 때부터 늦어도 고교시절부터 전문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기초교육부터 시작하다보니 봉제와 패턴 등의 실무기초 기반이 취약하고, 시대변화에도 제대로 발맞추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중국에서는 패션디자인을 ‘복장 설계(服裝 設計)’라고 하는데, ‘디자인은 설계’라는 점에서 정확한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예술적인 부분은 강조하면서 기능적인 부분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패션분야의 저명한 대학교수가 우리나라 재단분야의 서완석 명장 같은 이를 무시하는 걸 보면서 놀란 적이 있다고 들려준다. 

 

패션에서 디자인과 기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소재(원단). 이 부분에서도 대구의 화섬, 진주의 실크, 안동의 삼베 등 지역별 특산 소재들이 서로 긴밀하게 교류하고 협업하면 더 큰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한 현실에 대해 아쉬워했다. 

 

- 그렇다면 한국패션의 현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암담하다고 생각한다. 수입자유화 조치로 문호개방이 된 지 40년이 지났는데, 뚜렷한 대책도 못 세운 채 그동안 ‘장님 고객’들을 상대로 장사해 왔다. 디자인을 열심히 베낀 열성으로 소재도 열심히 베꼈으면 좀 나았으련만 그러지도 못했다.”

 

얼마 전 강남의 어느 디자이너가 시내 특급호텔에서 패션쇼를 했는데, 외국 유명 디자이너의 이름이 새겨진 원단을 사용하는 걸 보면서 놀랐다고 한다. 

 

소비자들이 원단에 새겨진 유명 디자이너 이름을 보고 옷을 구매하는 것을 보면서, 소재의 중요성이 소비자들에게도 통하는 걸 확인하면서도 외국 디자이너들은 그렇게 유치하게 안한다며 한편으론 씁쓸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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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실크쇼 출품작(모델 이희재,1977년)>

 

허준 선생은 한국패션의 미래도 ‘암담하다’고 한다. 일본에서 주목받고 있는 ‘패션화된 몸만들기(Fashioned Body)’는 피부인지 몸인지 모를 정도로 몸에 밀착된 옷으로, 이 경우 심지도 안감도 패드도 필요 없고 메이크업이나 몸의 문신도 옷과 어울려 하나가 되는 새로운 스타일이다. 

 

에어로빅복이나 레깅스처럼 속옷이 겉옷으로 대중화된 지도 오래지 않느냐면서, 20세기가 디자인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소재의 시대라고 말한다.     

        

기능성 소재 개발이 시급한데 우리나라에서는 스포츠웨어 분야에서나 좀 시도되고 있을 뿐 일반 의류에서는 여전히 전통 소재에 의존하고 있다면서 이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세계 패션의 흐름에 동참할 수 있겠느냐고 안타까워한다. 

 

우리나라 패션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서도 허준 선생의 평가는 부정적이다. 독설로 들릴 만큼 매섭고 아프고 쓰라리다. 패션계에서 50년을 보낸 원로 패션평론가의 비평이 여전히 팔팔하게 살아 있구나, 싶어서 아프면서도 반가웠다. 

 

건강 비결을 묻자 매일 집근처 불광천을 한 시간 동안 속보로 걷고(파워 워킹), 식단을 채식 위주로 하는 것이 전부라고 한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는 그동안 신문과 잡지 등에 연재했던 것들을 모아서 책으로 엮으려고 지난 자료들을 수집중이라고 한다. 이 작업을 통해 허준 선생이 30여 년 전에 연재했던 ‘한국패션 40년사’가 ‘한국패션 70년사’로 다시 나온다면 우리 패션계에 다시없을 기념비적인 저작물이 되겠다는 기대를 갖게 된다. ​ 

[이 게시물은 임경량 기자님에 의해 2019-12-06 12:46:49 SPECIAL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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