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울티모’ 디자이너 김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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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을 아는 만큼 패션 트렌드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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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재원 패션 저널리스트 (fpost@fost.co.kr) | 작성일 2020년 02월 20일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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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울티모’ 디자이너 김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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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멋> 기자 시절, 패션디자이너가 유명 화가를 인터뷰하는 형식의 기사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화가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미술관장을 지내던 권옥연 화백(1923~2011), 디자이너는 미술대학 출신의 ‘울티모’ 김동순 실장이었다. 

 

 

김동순 실장과 강남에서 만나 함께 가기로 했는데, 검은색 지프 레니게이드를 운전하고 왔다. 시골길을 다녀오기엔 안성맞춤이었지만 패션디자이너가 자가용으로 지프를 직접 운전하는 경우를 처음 봐서 그때의 인상이 아직도 생생하다. 

 

오고가는 길이 제법 멀기도 했고 네비게이션도 없던 시절이라 길을 잘못 들기도 했는데, 김동순 디자이너는 운전도 말투도 매우 씩씩했다. 단발머리에, 귀걸이나 목걸이 등의 치장을 하지 않은 수수한 차림새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1983년, 38세에 서울 압구정동에서 ‘울티모’로 데뷔한 김동순 디자이너는 동년배에 비해 출발이 10년쯤 늦다. 이화여대 조소과를 졸업하던 해(69년)에 동아방송 PD였던 송관률씨와 결혼한 그는 두 아이의 엄마로 평범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1975년에 남편이 이른바 ‘동아사태(동아일보사가 정부의 탄압을 버티지 못하고 부당함에 맞서던 기자들을 대규모로 해고한 사건)’로 강제 해직을 당하자 새로운 운명을 맞게 된다.

 

어느 날 남편의 선배 PD가 “패션디자인을 배우면 큰 패션회사에 취직자리를 알아봐주겠다”면서 국제복장학원을 소개해준 것이다. 속성반을 권유받았지만 ‘이왕 공부할거면 제대로 하겠다’는 생각에 어린 두 자녀를 친정에 맡기고 1년 과정 정규반에 입학해 열심히 다녔다. 

 

그러던 중 명동에서 우연히 권옥연 화백을 만났다. 권 화백은 김동순의 이화여대 재학 당시 회화과 교수였고, 스승과 제자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권 화백은 김동순에게 “패션디자인 공부? 잘 선택했다. 내 아내도 패션디자인을 하지 않느냐. 열심히 공부해라. 미적 감각도 뛰어나니 반드시 성공할 거다”라면서 격려해주었다. 권 화백의 부인은 극단 자유의 대표이자 무대의상 디자이너였던 이병복씨(1927~2017)다.

 

“어느 날 학원에 갔더니 분위기가 부산했다. 동료들이 ‘중앙디자인콘테스트’를 앞두고 준비하느라 난리였다. 나는 그때 코트를 만들고 있던 터라 그 옷을 완성해 출품했는데 입상했다. 콘테스트 사회를 보던 아나운서가 내 옷이 마음에 든다면서 자기에게 팔 수 없겠느냐고 물었는데, 판매용으로 만든 것도 아니어서 그냥 선물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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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S/S 일본 오사카컬렉션 패션쇼(왼쪽)와 김동순 디자이너가 그린 해당 의상 일러스트(오른쪽). 당시만 해도 일본은 한국 패션 자체를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김동순 디자이너가 한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우아하고 강렬한 컬렉션에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옷을 받은 아나운서는 김동순을 명동의 어느 매장에 추천해 줬고 면접을 보게 됐다. 일주일에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밤 9시까지 근무하고 낮 12시까지는 매장에서 판매도 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아직 대여섯 살밖에 안된 아이가 둘인 ‘엄마’ 입장에서는 수용하기 어려웠는데, 다른 곳들도 조건은 비슷했다. 그런 사정을 알게 된 한 대학 동기가 같은 대학 불문과 출신 친구인 M의 회사에 가보라고 권했다. M의 남편은 성도물산 최형로 사장이었다. 미국에 OEM으로 수출하던 성도물산이 내수시장 개척을 위해 새로운 브랜드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최 사장은 면접을 보는 자리에서 김동순이 입고 있던 면 티셔츠와 개더스커트를 보고 어디서 샀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동대문에서 원단을 사서 직접 만들었다”고 하자, 최사장은 “우리가 그런 옷을 만들려고 한다”면서 옆 건물로 데려갔다. 거기에는 (OEM 수출을 하던 곳이라) 엄청난 기계와 원단들이 잔뜩 들어차 있었고, 최 사장은 김동순에게 “여기에 있는 원단들을 마음대로 쓰라”고 했다. 그렇게 김동순은 1978년, 성도물산의 브랜드 ‘톰보이’ 디자이너로 패션디자이너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성도물산이 야심차게 개발한 ‘톰보이’는 브랜드 이름부터 색달랐고, 당시 여자 기성복은 상하의 한 벌을 갖춰 입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이던 때여서 단품 위주의 ‘톰보이’는 출범과 동시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정장의 개념에서 벗어나 니트나 면, 코듀로이 소재 재킷, 데님, 티셔츠 등 지금은 패션의 기본이 되어버린 코디네이션 개념을 ‘톰보이’가 도입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캐주얼 브랜드’가 등장하게 된 때, 김동순은 그 중심에 있던 ‘톰보이’ 디자인의 주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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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S/S 일본 오사카컬렉션 패션쇼>

남편의 강제 해직, 패션디자이너로 새 삶 시작


“78년 7월 ‘톰보이’ 오픈을 앞두고 면접을 봤는데, 언제부터 출근하겠냐고 해서 8월 1일부터 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최 사장이 출근하기 전이지만 디스플레이용으로 옷 몇 점을 만들어달라고 했고 일주일동안 여러 스타일을 만들어 매장에 전시했다.” 

 

그런데 그 ‘디스플레이용 옷’들의 인기가 폭발해 오픈 당일 매출 목표를 6배 정도 초과 달성했다. 출근하기 전부터 이른바 ‘대박 디자이너’가 된 것이다. 이어 ‘리니아(Line이라는 뜻)’라는 브랜드도 론칭했는데, 벨로아 소재를 주로 사용한 ‘리니아’는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대박을 친 알짜 브랜드였다.

 

‘톰보이’에서 성과를 높이자 81년 교복자율화 바람을 타고 월급의 몇 배를 더 주겠다면서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어느 대기업은 기존 급여의 10배 이상을 주겠다, 토요일 오후 2시간만 근무해도 된다는 제안을 했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친구 남편의 회사에 다니면서 돈 때문에 이직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자 나중에 대학에서 강사라도 하고픈 마음에 모교 대학원 복식디자인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학부 전공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추가학점을 요구받고 특정 교수 과목의 점수까지 박하게 나오면서 대학원을 그만 뒀다. 대학원을 포기했더니 회사도 다닐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회사에 사직 의사를 밝히니, ‘리니아’를 운영해보라며 스튜디오 차리는 비용까지 지원해줘서 1~2년 정도 운영하다가 1983년에 독립, 압구정동에 ‘울티모’를 열었다.  

 

‘울티모(Ultimo)’는 ‘가장 최근(the latest)’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로 남성명사다. 처음엔 남성복 브랜드로 시작했다가 6개월쯤 뒤부터 여성복으로 전환했는데, 같은 뜻의 여성명사인 ‘울티마(Ultima)’보다 어감이 더 마음에 들어서 그냥 쓰기로 했다고 한다.

 

이때 부군 송관률씨는 패션기업 경영인으로 탈바꿈해 아내가 한평생 디자인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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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를 알려면 현대미술 이해는 필수”


‘톰보이’ 디자이너로 근무하는 동안 김동순은 일종의 보너스 형식으로 일본은 물론 미국과 유럽 등 해외출장을 많이 다녔다. 출국 자체가 무척 까다롭던 시절이었기에 당시의 경험은 디자이너로서 안목을 넓히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1988년 여행자유화 조치가 시행되면서는 날개를 단 듯 했다. 인도만 10번 이상 다녀왔고, 네팔도 자주 가서 거의 가이드 수준일 정도. 스리랑카와 터키, 동유럽의 조지아나 우크라이나 등 일반인들이 자주 가지 않는 곳들도 일찍부터 많이 다녔다. 1989년 베니스 비엔날레를 시작으로 유럽 각국에서 열리는 비엔날레도 거의 빠지지 않고 참관했다. 

 

김동순 선생은 “패션 디자이너에게 미술, 특히 현대 미술에 대한 이해는 필수”라고 강조한다. 90년대 초반 건국대와 이화여대에서 겸임교수로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가장 강조했던 점도 “현대미술을 모르면 트렌드를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크리스토 자바체프다운’ 또는 ‘안젤름 키퍼적인’이라고 할 때, 크리스토가 베를린장벽이 무너질 때 독일 국회의사당 전체를 천으로 감싸고 파리의 명물 퐁 네프 다리도 천으로 감싼 미술가이고 안젤름 키퍼는 화가이자 조각가라는 특징은 물론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재료나 색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1991년 1월, 김동순 디자이너는 당시 동아일보사가 제정한 ‘올해의 디자이너상’ 90년도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신우, 진태옥, 앙드레김, 설윤형 등 이전에 20년 이상 경력을 가진 디자이너들이 받은 상을 데뷔한 지 7년 만에 받은 것이다. 그가 데뷔 10년도 안되어 정상급 디자이너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꼽게 된다.  

 

첫째는 중앙디자인콘테스트에 입상한 이후 77년부터 매년 패션쇼에 참가하고, 이후 서울패션디자이너협의회(SFAA) 초창기 멤버로 최초의 서울컬렉션에 참가하는 등 신작 발표 무대를 끊임없이 가졌다는 것이다. 1990년에는 오사카컬렉션, 93년엔 도쿄컬렉션 등 일본 무대에서도 ‘디자이너 김동순’을 알렸다.

 

프랑스를 비롯한 이탈리아, 영국, 미국 등 패션 선진국들은 매년 일정하게 새로운 작품을 선보여야 하는 컬렉션 제도가 일찍부터 정착돼 있었다. 컬렉션 제도가 발달하지 않았던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신작’을 발표하는 디자이너가 극히 드물었는데, 김동순 디자이너는 77년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한해도 거르지 않고 신작을 발표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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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월 24일 중국 광서TV가 설날 특별 프로그램으로 방영했던‘울티모’컬렉션 패션쇼(오른쪽). 해당 시즌 컬렉션은 국내에서도 대 히트를 쳤다. photo 울티모 제공​>

 

인체를 입체적으로 보고 표현하는 것은 그의 전공(조소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전통미와 현대미술적 감각의 조화는 ‘김동순 디자인’의 뿌리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 해마다 새롭게 해석하여 새 작품을 내놓는다. 

 

프랑스의 패션평론가 지아니 사메는 컬렉션 출품작을 평가할 때 “신인 디자이너들은 무엇이 새로운지를 중점적으로 보고, 기성 디자이너들은 무엇이 새로워졌는지 본다”고 했는데, 김동순은 매 시즌 ‘이번엔 어떤 변화를 보여줄지’ 호기심을 갖게 만든 디자이너였다. 그의 80년대 90년대 의상들조차 최근의 작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감각적으로 여전히 신선하고 매력적이다.   

 

둘째는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출발을 맞춤의상(양장점)이 아니라 기성복(톰보이)에서 시작했다는 점이다. 자신이 디자인한 옷이 어느 한 개인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에게 크게 인정받아본 경험을 한 것은 김동순 디자이너 연배에서는 유일한 케이스였다.

 

특정 고객의 비위를 맞춰본 적이 없는 그는 일상생활에서도 상대방이 동료나 선후배이건, 기자이건, 정부나 지자체 담당자이건 자신의 소신을 가감 없이 밝힌다. 상도의에 벗어나거나, 상식에 어긋나는 말과 행동을 할 때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래서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은데, 그 또한 김동순 디자이너의 특징 중 하나다. 

 

d209bdf74155ce7de3792ba58d5068cb_1581474188_5026.jpg <잡지협찬>

 

김동순 디자이너는 유난히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서울 도곡동 울티모 본사 5층의 작업실은 원단 샘플, 세계 각국의 기념물들에 더해 각종 자료와 책들이 사방의 벽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그의 책 사랑은, 아버지 직장(대한중석) 때문에 강원도 영월에서 살던 10대 소녀 시절부터 시작됐다. 

 

아버지가 서울 갔다 오면서 사다준 금박으로 장식된 책, <렌의 애가>(모윤숙)를 지금도 갖고 있을 정도. 나이 70이 되었을 때 가장 받고 싶은 선물로 ‘세계문학전집’을 원해서 1백 권짜리 세계문학전집에, 사상전집 1백 권까지 2백 권을 선물 받았을 정도다. 

 

책 사랑 못지않게 눈에 띄는 취미는 스크랩이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한번 보고 버리기 아까운 것들은 스크랩해둔다. 역사 관련 기록들이 많고, 인상적인 사진들(조각, 건축, 자연 등)도 스크랩해둔 게 많다. 보고 싶은 책들 관련 스크랩은 따로 두고 있는데, 여백마다 그 책에 대한 생각들이 손 글씨로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다채로운 내용의 스크랩북을 흥미롭게 살펴보고 있는 나에게 “미국 연방대법원청사에 공자 입상이 세워져 있는 걸 아느냐?”고 묻는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연방대법원 동편 입구에 모세 좌상을 중심으로 모세 왼쪽에 솔론 입상, 오른쪽에 공자 입상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개신교가 중시하는 예수를 빼고 이 3인조 석상을 세운 이유에 대해 중앙일보가 2020년 1월8일자로 보도한 내용을 스크랩한 것이다.   

 

그가 “놀랍지 않느냐?”고 묻는다. 놀랍다. 그런 사실 자체도 놀랍고, 그런 사실에 관심을 갖고 놀라워하는 김동순 디자이너의 끝없는 관심사도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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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획에 없던 길이 최적의 길이었다


김동순은 국제복장학원도,‘톰보이’라는 브랜드도, 중앙디자인콘테스트라는 행사도 알지 못했다. 지인에 의해 혹은 우연히 알게 되어 패션디자인을 공부하고, 취직하고, 콘테스트에 입상했다. 

 

그가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일들인데, 평생의 업으로 삼아 37년째 그 길을 가고 있다. 거짓 꾸밈을 싫어하고, 고정된 것보다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며, 패션 이외의 분야에 대해서도 무한한 호기심을 갖고 접촉하고 수용해온 삶. 쿠바 여행을 갔다가 체 게바라의 자서전을 읽고, ‘자신의 이상을 실천한 사람’으로서 존경하게 되었다는 김동순. 그의 작업실 한쪽 벽엔 체 게바라의 커다란 초상화가 걸려 있다. 

 

책과 미술, 여행을 좋아하고 호기심이 여전히 왕성하다는 점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패션디자이너는 ‘입어서 편하고, 입는 사람이 좋아하는 옷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패션디자이너로서의 삶은 차츰 정리하고 싶다고 했다. 한때 40개까지 매장을 운영했지만 IMF 이후 줄여나가 지금은 전국 백화점에 17개 매장을 내고 있다.  

 

패션디자이너로서의 삶은 정리하면서 여행 다니고, 책 실컷 보는 것은 늘리는 삶, 그것이 김동순 선생이 지금 꿈꾸고 있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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