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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바지와 바꾼 인생, 뱅뱅 권종열 회장에게서 해법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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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아람 기자 (lar@fpost.co.kr) | 작성일 2020년 09월 14일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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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품질 합리적인 가격 … 가성비 철학 주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원단 만져 
위기를 극복한 비결 ‘옷 밖에 몰랐다’​ 

‘뱅뱅사거리’라는 이름은 1980년대 강남역 부근 눈에 띄던 건물이 ‘뱅뱅’ 본사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정작 사거리 표지판에는 알파벳 표기법에 따라 ‘Paengbaeng’이라고 딴판으로 적혀있다. 

 

요즘 10~20 세대에게 ‘뱅뱅’은 다소 생소하거나 ‘아재 브랜드’라 인식될 수 있다. 하지만 ‘뱅뱅사거리’라 하면 1000만 인구, 서울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을 만큼 강남의 유명한 지명이며, 뱅뱅 본사 건물은 만남의 장소라 불릴 정도로 랜드마크가 됐다.

 

‘뱅뱅사거리’와 ‘뱅뱅’은 패션 업계 최초라는 타이틀을 지니고 있다. ‘뱅뱅사거리’는 브랜드 네임을 딴 최초의 거리고, ‘뱅뱅’은 국내 최초의 청바지 브랜드이자 국내 패션 시장의 선구자다. ‘뱅뱅’이 태어난 지 올해로 50년이 됐다. 

 

지난 1970년 추동시즌 론칭됐으니 ‘뱅뱅’의 역사는 반세기가 지난 셈이다. 

 

캐주얼 업계의 성공 모델

수많은 브랜드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하지만 ‘뱅뱅’은 토종 캐주얼 마켓에서 여전히 굳건한 위상을 지켜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현재 캐주얼 업체 대부분이 과거 ‘뱅뱅’의 성공을 보고 캐주얼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뱅뱅’은 캐주얼 마켓에 산증인이자 지침서 역할을 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말한다.  

 

권종열 뱅뱅 회장은 자신을 드러내고자 했던 적이 별로 없었다. 회장실이 버젓이 있음에도 불구, 집무실에 있는 것보다 디자인실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직원들은 결재를 받기 위해 회장실이 아닌 디자인실을 찾았다. 치열한 경쟁에서 오랜 시간을 버텨온 뱅뱅그룹 권종열 회장의 이야기다. 

 

권종열 회장은 기자의 인터뷰 요청에 “지금 시기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다. 지금은 자랑할 것이 없지만, 한 브랜드로 반세기 넘게 살아남은 것은 자랑할 만한 일이다.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반세기를 보낸 ‘뱅뱅’의 역사를 통해 지금의 역경을 이겨나갈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토종 청바지의 탄생 

권종열 회장은 올해로 87세다. 패션 업계 오너 중 최고령이다. 그럼에도 가장 늦게 퇴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평일에는 디자인실에서 보내고, 주말에는 매장을 방문하는 것이 그의 일상이다. 코로나 사태로 운동은 잠시 쉬고 있지만 건강관리도 꾸준하다. 회사에는 본부장이 따로 없다.  팀장급 전결도 없다. 모든 자금의 흐름은 아직 권회장의 손을 거쳐야 한다.

 

그런 그를 직원들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회장님은 뱅뱅 밖에 모르는 바보’, ‘옷밖에 모르는 회장님’이라고 부르곤 한다.

권 회장은 1961년 평화시장에서 재봉틀 3대와 원단 16필로 출발했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딱 60년 전의 일이다.

 

그의 고향은 평양이다. 1·4후퇴 때 17세였던 권 회장은 13세 동생과 둘이서 유엔군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다. 동대문 옷 장사가 괜찮다는 말을 듣고 대구에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2평 남짓한 가게를 얻었다. 뱅뱅그룹의 시작이었다.

 

이후 1970년 태창에서 수출하다 남은 청바지 원단 1천여필로 청바지 사업을 하게 됐다. 처음부터 봉제까지 직접 도맡아했다. 만들 줄 알아야 팔 줄도 안다는 그의 원칙이었다.

 

당시 ‘뱅뱅’이라는 브랜드로 한국 최초로 청바지를 생산했고 이는 국내 패션사에 한 획을 그었다. 브랜드 네임 ‘뱅뱅’은 총소리인 ‘Bang’에서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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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뱅’ 여주 물류창고에는 그동안 활동한‘뱅뱅’모델의 사진이 연도별로 전시 돼있다.>

 

‘뱅뱅’의 탄생 비화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1970년 당시 상표권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시절 홍콩 브랜드이던 ‘뱅뱅’과 같은 이름으로 제품을 내기 시작했다. 이후 홍콩 경영난으로 회사가 아예 사라지면서 한국의 ‘뱅뱅’만 남아 상표권 문제에서 자유로워졌다.

 

이후 10여 년간 ‘뱅뱅’은 고속 성장했다. 좋은 품질의 옷을 경제적인 가격에 판매한다는 인식이 소비자 사이에서 확산됐다. 누구나 ‘뱅뱅’ 청바지 한 두 벌쯤은 갖고 있을 정도였다. 국내 청바지 시장의 70% 이상을 독차지했다. 하지만 1980년대에 접어들어 해외 데님 브랜드들이 국내 시장에 진출하면서 첫 번째 성장의 한계에 부딪혔다. 

 

 ‘뱅뱅’은 움츠리지 않고 당대 최고 인기 가수인 전영록을 내세워 과감하게 TV CF를 진행했다. 대성공이었다. 대중적인 인지도를 회복하고 재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지금까지 명성을 이어오게 됐다. 위기에 닥쳤을 때 더 공격적인 투자를 했던 것이 위기를 이겨낼 수 있게 했다.

 

가성비 끝판왕

지금까지 ‘뱅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제품력’이었다. 특히 ‘가성비’다. 부담 없는 가격에 높은 실용성, 우수한 품질을 겸비, 합리적 소비를 지향하는 어덜트 고객들에게 어필해 인지도를 높였다. 특히 ‘뱅뱅’은 서민층에게 없어서는 안 될 브랜드로 인식되고 있다.

 

이는 권회장의 ‘가성비’ 철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디자인과 원단에 대한 그의 열정은 누구도 못 말린다. 원단을 만져보면 하물며 두께가 몇 센티미터인지 혹은 몇 그램인지 단번에 알아본다. 어지간한 소재 담당이나 디자이너는 혀를 내두를 정도다. 지난 60년 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원단을 만져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품력을 향한 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권 회장의 곁에는 항상 수첩이 있다. 들은 것을 메모하고 학습한다. 1년이 지나면 메모한 수첩만 몇 십 권에 이른다. 예전 다이어리에는 첫 페이지에 국내 지도가 있었는데 종이를 아끼기 위해 지도 위에다 메모를 한 일화도 있다고 한다.   

 

몇 년 전의 사소한 일, 직원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일도 기억한다. 과거 제품에 대한 것부터 마케팅, 영업에 이르기까지 권회장의 기억력의 근간은 매일매일 체크하는 메모에서부터 비롯된다. 생산처 확보도 ‘뱅뱅’의 반세기 역사에 한몫했다. 권 회장은 지난 1992년 국내 브랜드들 중, 최초로 생산기지를 중국으로 옮겨 직생산을 도입했다. 현재도 베이징, 칭다오 등 10곳에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중국 각지의 우수한 생산라인을 개발해 제품 기술을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국내 최초로 자체 스톤 워싱 제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대량 생산 원칙을 고수하다 보니 남들보다 앞서 물류에도 과감하게 투자했다. 지난 2009년 경기도 여주에 메머드급 규모의 최첨단 설비를 갖춘 통합 물류센터를 준공했다. 이는 신속하고 원활한 물량 공급을 위해 화성에 분산되어 있던 기존 물류센터를 통합한 것이다. 이곳은 지상 4층 1개동 6,504평에 연면적 15,000평으로 출고용, 반품용, 행거용 소터기와 자동 롤러박스, 패킹 시스템, 컨베이어 시스템 등 최첨단 자동화 설비 시스템을 도입해 물류시스템의 경쟁력을 높였다.

 

그 결과 ‘뱅뱅’은 10년 전 가격을 고수하며 청바지만은 노세일을 고집하고 있다. 또 쟁쟁한 해외 브랜드를 제치고 85년, 89년, 90년에는 공업진흥청 품질 평가에서 전체 A를 획득하며 ‘가성비=뱅뱅’ 신화를 이어가고 있다. 물론 마케팅에 대한 경쟁력도 빼 놓을 수 없다.

 

지난 1983년 가수 전영록을 기용해 제작한 광고는 ‘뱅뱅’의 명성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후 박중훈, 고인이 된 최진실 씨를 비롯해 이정재, 정우성, 차승원 등 당대 기라성 같은 배우들과 함께 했다.

 

“빛나는~아침 햇살에~”로 시작해 “가자! 젊음이여! 뱅뱅!”​

“빛나는~아침 햇살에~”로 시작해 “가자! 젊음이여! 뱅뱅!”으로 마무리 되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고 흥얼거렸을 CM송은 40~50대 고객들은 누구나 알고 있다. 

 

마케팅을 시작한 83년부터 현재까지 ‘뱅뱅’ 모델을 지낸 연예인만 해도 40명이 넘는다. 현재는 그동안 활동한 모델의 사진을 연도별로 여주 물류창고에 전시해 놓음으로써 ‘뱅뱅’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모든 노력이 ‘뱅뱅’이 지난 반세기 동안 장수브랜드의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하물며 몇 년 전에는 소위 ‘뱅뱅이론’ 이라는 말이 네티즌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한 블로거가 문득 청바지 시장 1위가 어디일까 하고 검색을 해보니 예상치 못하게 ‘뱅뱅’이 1위였다는 이야기이다. 

 

주변에 ‘뱅뱅’ 청바지를 사는 사람이 없고 브랜드 선호도가 여타 해외 브랜드에 밀렸지만 2천억에 달하는 매출로 업계 1위의 매출을 올렸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젊은 소비자들에게는 존재조차 모르는 국산 청바지 ‘뱅뱅’은 강하게 살아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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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뱅 본사>

 

장수 브랜드의 슬픈 50주년

반세기에 걸친 브랜드라면 자축하고 싶고 그간의 역사를 소비자에게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겠지만 뱅뱅은 그러지 않았다.

올 초부터 코로나 19가 국내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자 당초 계획했던 행사나 프로모션을 전면 취소했다. 브랜드 입장에서 보면 대형 프로젝트를 어쩔 수 없이 날려 보낸 셈이다. 

 

특히 지난해부터 시작된 일본 제품 불매 운동과 관련, 애국 마케팅도 진행하지 않았다. ‘자랑할 것이 없다’, ‘현 시점에서 내세울 것이 없다’는 권 회장의 지시 때문이었다. 이렇게 ‘뱅뱅’의 탄생 50주년은 아무도 모르게 지나가게 됐다. 물론 코로나 여파가 컸지만 가장 큰 이유는 실적 부진에서 찾을 수 있다.

 

‘뱅뱅’은 지난 2010년대 초반까지 만해도 국내 뿐 아니라 해외 브랜드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매출 규모를 자랑했다.

 

‘유니클로’, ‘자라’ 등 글로벌 및 토종 SPA의 등장으로 많은 캐주얼 브랜드들이 어려움을 겪었지만 남보다 일찍 홈쇼핑 사업에 뛰어들며 매출액을 보전하는 성과를 냈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부터 매출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홈쇼핑과 주력 유통인 가두매출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뱅뱅’은 지난 2013년 매출 1744억 원(공시가 매출 기준)으로 역대 최고점을 찍은 후 매출이 급감했다. 매년 10% 가량의 마이너스 성장이 이어지더니 지난해에는 832억 원의 매출을 기록, 불과 5년 만에 절반 정도 매출이 줄었다.

 

물론 이 같은 매출 하락 현상이 유독 ‘뱅뱅’만의 문제는 아니다. 모든 토종 캐주얼 브랜드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뱅뱅’ 역시 빠져나올 수 없는 터널에 갇혀 버렸다.

 

‘뱅뱅’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업계 관계자들은 현재 ‘뱅뱅’에게 쌓인 숙제가 많다고 지적한다. 또 지금이 창사 이래 가장 큰 위기라고 덧붙인다.

 

제품을 제외하고 ‘뱅뱅’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직영 중심의 로드숍 비즈니스였다. 과거 세정의 월메이드(구 인디안)과 더불어 ‘뱅뱅’이 나들목에 들어서면 하나의 상권이 생겨날 정도로 로드 상권에서 영향력은 대단했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유통구조가 직영점과 유통숍(마트 포함)으로 재편됐다.

 

300여개에 가까웠던 유통점은 100여개가 줄었고 입점 매장 위치도 더 이상 좋은 편이 아니다. 아무리 ‘뱅뱅’ 제품이 가성비가 좋다고는 하지만 이미 ‘뱅뱅’과 비슷한 콘셉트의 토종 SPA 브랜드에게 인지도와 마케팅, 유통 구조 등 전반적인 경쟁력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특히 SPA와 경쟁하기 위해 늘려놓은 스타일 수도 너무 많다고 지적한다. 현재는 수가 줄기는 했지만 타 브랜드에 비해 여전히 많은 숫자임에는 틀림없다.

과거에는 권종열 회장 중심으로 똘똘 뭉쳐 위기를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의 변화무쌍함은 과거의 것과는 조금 다른 형태다. 시대적 변화에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동안 ‘뱅뱅’이 인재를 육성하는데 소홀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본부장 제도가 없다보니 외부 핵심 인력 영입도 거의 없었다. ‘뱅뱅’에 입사하면 오랜 기간 근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바꿔 말하면 50년 된 장수 브랜드이자 기업이지만 업계에서는 이곳 출신을 중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업계에 ‘뱅뱅’ 출신 인맥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최근 권 회장은 온라인 사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도입이 결정되기 까지 얼마나 시간이 소요될 지도 모르고 중장년층 고객 중심의 ‘뱅뱅’이 실효성을 거둘지도 의문이다. 그렇다고 대세인 온라인을 안 할 수도 없다.

 

뱅뱅 출신 관계자는 “어떻게 보면 현재가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마지막 시기다. 체제 전환을 위한 빠른 변화가 무조건 수반되어야한다. 과거의 방식으로는 더 어려워 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는 셈이다. 

 

현재 ‘뱅뱅’의 가장 큰 자산 중 하나는 역사와 전통이다. 최근 이 업종에서 30~40년 된 브랜드들이 타 업종과의 활발한 협업을 통해 이슈화가 되고 있다. 이를 잘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트렌드 자체가 뉴트로에 집중되고 있는 만큼 익숙한 상품들의 새로운 변신이 소비자들에게 재미있는 경험을 제공하며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다. 즉 장수 브랜드를 활용한 이색 협업 상품을 통해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후계구도는 불문율

뱅뱅그룹의 후계 구도는 업계에 불문율이다. 누구도 거론하지 않고, 해당 당사자들도 거론되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권종열 회장은 87세의 고령이다. 후계구도를 명확히 할 필요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강상에 문제가 없으며 ‘뱅뱅’의 최대 주주인데다가 속내를 꺼내지 않아, 후계구도가 아직은 불명확하다.

 

뱅뱅어패럴의 현 최대 주주는 권종열 회장이다. 총 57.2%에 달하는 49,491주를 보유하고 있다. 이어 부인인 허경자 부회장이 1만주(11.6%)를 보유하며 2대 주주로 있다.

 

뱅뱅그룹의 후계구도는 장남인 권성윤 대표, 차남 권성재 대표, 3남 권성환 대표의 3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들 모두 경영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 별도 법인의 대표이사이며, 뱅뱅어패럴 주식 9천주(10.4%)를 똑같이 보유하고 있다.

 

현재 권종열 회장을 비롯 허경자 부회장과 2세들이 보유한 회사는 뱅뱅어패럴을 비롯 엠케이코리아, 디씨티와이, 헨어스, 비앤지, 야드엘파이낸스, 야드엘어패럴, 넥스트에프엘, 더휴컴퍼니 및 아이에프오상사다. 이 중 패션 브랜드를 전개하고 있는 기업은 엠케이코리아(대표 권성윤), 더휴컴퍼니(대표 권성재), 헨어스(대표 권성환) 등이다.

 

장남인 권성윤 대표는 미국 사우스이스턴대와 아메리칸대에서 MBA를 마친 후 지난 1993년도에 뱅뱅어패럴에 입사했다. 다양한 업무 경험을 쌓은 후 지난 2005년부터는 뱅뱅어패럴의 계열사인 DCTY의 대표를 맡아 아동복 사업을 맡기도 했고 뱅뱅어패럴 사장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뱅뱅어패럴의 결재 라인에서 돌연 사라지면서 궁금증이 증폭됐다. 

 

그러다 지난해 화승에서 전개하던 아웃도어 ‘머렐’의 전개권을 확보하고 엠케이코리아를 설립, 이번 시즌 론칭했다. 인수금액과 브랜드 전개에 대한 자금 출처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업계는 권종열 회장 측에서 흘러들어왔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예상하고 있다. 즉 이번 ‘머렐’의 성공 여부가 후계구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동안 후계 구도 중 가장 많이 거론되던 인물은 권성재 더휴컴퍼니 대표였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은 운신의 폭이 좁아진 모양새라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UGIZ, 어스앤뎀을 필두로 높은 성장세를 보이며 ‘후계 구도에 한발 앞선 것이 아니냐’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2017년 돌연 기업회생을 신청하며 원점으로 돌아왔다. 1년 만에 기업회생이 종료되어 정상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더휴컴퍼니는 2018년 5월 31일 부로 권종열 회장이 회생인가 출자전환을 통해 최대 주주가 됐다. 

 

3남인 권성환 대표는 ‘에드윈’을 맡아 10여 년 간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감각적이며 트렌드를 읽는 능력이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두 형들에 비해서는 뱅뱅어패럴의 경영권과는 다소 거리가 멀지 않느냐는 것이 중론이다.

 

권종열 회장은 지난 2015년 메르스 당시 병을 얻어 몇 달간 입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에 의하면 권 회장님이 와병 이후 생각이 달라지면서 후계 구도를 정해 놓은 것이 아닌가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하고 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권 회장님에게 첫째 아들이 ‘뱅뱅’이라할 만큼 ‘뱅뱅’에 대한 열정이 크다. 후계 구도는 개개인의 능력에 따라 좌우될 가망성이 높다”고 말했다. 물론 3세 경영으로 곧바로 전환될 가망성도 열려있다. 하지만 3세들이 뱅뱅그룹 내에서 경영 수업을 받고 있는 사례가 없는 것으로 파악되면서 가망성은 놓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100년 향한 새로운 도약

뱅뱅은 현재 해결해 가야할 문제도 많고 재도약을 위한 방침도 마련해야 하지만, 올해 50주년을 맞이했다는 점에서 국내 패션 마켓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지금도 수많은 브랜드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있으며, 30년 이상 된 장수 브랜드도 얼마 되지 않는 국내 패션 마켓에 ‘뱅뱅’의 발자취 자체가 패션의 산 증인이기 때문이다. 

 

이면에는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자산이 있다. 경쟁이 치열한 현재 시장구조에서는 풍파를 견디고 살아남은 브랜드가 진정한 강자다. 이미 반세기를 지내온 ‘뱅뱅’은 절대 강자의 길을 걷고 있다. 철저히 시장 원칙을 지켰고 브랜드 관리를 중시했던 결과물일 것이다. 

 

모든 브랜드는 시장 수명주기 흐름에 따라 영고성쇠(榮枯盛衰)의 길을 걷는다. 물론 지금의 ‘뱅뱅’에게는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의 어려움을 슬기롭게 대처해 간다면 비단 50년을 넘어 100년 된 캐주얼 브랜드가 국내에도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뱅뱅에게는 그동안 쌓아온 자산과 어려움을 이겨낼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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