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도 커피처럼 원하는 대로 블렌딩하세요 > 입고 먹고 쓰는 것들에 대하여/강원식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입고 먹고 쓰는 것들에 대하여/강원식

쌀도 커피처럼 원하는 대로 블렌딩하세요

페이지 정보

작성자 강원식 코넥스솔루션 대표 (kws@cnxsol.com) | 작성일 2021년 04월 26일 URL 복사
카카오톡 URL 복사

본문

 

1ac764dbaa8d3f27d666033fa01e9404_1619327998_3753.jpg

얼마 전 을지로의 한 이자카야에서 혼술을 하다가 남은 안주에 밥이 먹고 싶어져서 메뉴를 보니 공깃밥이 무려 3천 원이나 하는 것을 보고 더 궁금함이 커져서 밥을 주문한 적이 있다. 

사기그릇에 고슬고슬 밥을 담아준다. 역시 미리 퍼 놓은 스테인리스 공깃밥보다는 밥솥에서 바로 퍼주는 밥이 훨씬 맛있다. 그래도 밥 한 그릇에 3천 원은 꽤 비싸다. 

그런데 한 젓가락 밥을 떠먹자마자 진하게 풍기는 고소한 풍미에 눈이 번쩍 떠졌다. 밥그릇을 싹싹 비우고 나서 도저히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어서 주인에게 쌀은 어디 것을 쓰냐고 물어보니 친절하게도 쌀을 주문한 사이트를 알려주셨다. 처음 듣는 ‘골든퀸 3호’라는 품종이었다. 

그러고 보니 국내에서 맛있는 쌀을 찾아서 먹은 지가 꽤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에서 주는 공깃밥은 영 맛대가리가 없다 보니 잘 안 먹었고, 집에서는 다이어트를 이유로 흰 쌀밥을 멀리했다. 

국내에도 고시히카리 같은 품종이 수입되는 등 고급 쌀의 공급이 확산되기 시작해서 찾아 먹기는 했지만 역시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자연스레 관심도 멀어졌다. 

그런데 다시 맛있는 쌀밥을 먹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쳐 올라왔다. 집에 가자마자 인터넷에서 ‘골든퀸 3호’를 주문하고 택배가 도착하자마자 밥을 해서 먹었다. 특유의 고소한 향미가 일품이었다. 

이 골든퀸이라는 품종은 국내에서 개발된 품종인데, 알음알음 인기리에 저변을 확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일반 쌀보다 비싸지만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는 기쁨이 더 컸다. 

밥맛은 쌀이 좌우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여 년 전 일본에서였다. 군대를 마친 후 고등학교 시절 절친과 함께 겨울 방학 기간 어학연수를 빙자한 일본 여행을 떠났다. 여행이기는 했지만 두어 달을 머무는 자취 생활이기도 했기 때문에,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숙소에 짐을 풀고 끼니를 해결할 준비부터 했다. 

달고 고소한 밥맛의 추억
1ac764dbaa8d3f27d666033fa01e9404_1619328585_6135.jpg
​<아키타코마치​. photo egloos>

기숙사 주변의 주택가를 돌다가 발견한 슈퍼마켓에서 장을 봤다. 제일 처음으로 산 것이 ‘아키타코마치’라는 품종의 쌀 한 포대였다. 한국에서 흔히 보던 포대 자루 같은 것이 아니라 겉면에 전통의상을 입은 여성의 사진이 들어가 포장도 예뻤다.

좀 더 일본풍의 고풍스러운 포장에 담긴 곱절은 비싼 쌀도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유명한 ‘고시히카리'라는 품종이었다.
 
그날 저녁에 기숙사에 돌아와서 지어먹은 밥맛은 충격적이었다. 탱글탱글한 식감에 맛은 어찌나 달고 고소하던지. 그 후로 일본의 식당에서도 몇 끼니를 먹고 나서 친구와 함께 내린 결론은 일본은 ‘밥’ 그 자체, 그러니까 쌀 자체의 맛이 매우 좋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도 직업상 출장으로 일본을 자주 갔는데, 어느 식당을 가도 밥맛이 기본적으로 높다는 것을 느꼈다. 맛도 맛이지만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 이상으로 흰 쌀밥을 참 좋아한다.

일단 미리 퍼 놓는 공깃밥 문화가 없다. 밥을 시키면 밥솥에서 따끈한 밥을 사기그릇에 바로 퍼서 내어준다. 소식을 하는 일본인이라는 선입견이 무색하게, 밥의 양도 우리나라 공깃밥을 너끈히 능가하는 곳이 많다. ‘오카와리(한 그릇 추가)’는 얼마든지 무료로 주는 식당도 많다. 

두 그릇씩 밥을 먹는 남성들도 제법 많다.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를 유심히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주인공이 술집에서 안주를 반찬 삼아 밥을 먹는 장면이 제법 나온다. 밥이 반찬보다 좀 부족하다 싶으면 곧잘 밥을 추가해 먹는다.
 
우리 상식으로는 조금 희한한 백반 정식 메뉴도 있다. 주로 관서 지방의 풍습이긴 하지만 오코노미야키, 군만두, 야키소바와 같은 탄수화물 중심의 단일 요리를 메인 반찬으로 밥과 함께 먹는다. 

한국식 고깃집을 가면 밥을 나중에 먹는 한국인들과 달리 이 맛있는 고기를 왜 밥과 같이 안 먹느냐며 밥을 시켜 고기를 반찬 삼아 먹는 일본인들도 꽤 많이 보았다. 여하튼 밥을 참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쌀 편집숍도 있다고?
1ac764dbaa8d3f27d666033fa01e9404_1619327819_8595.jpg
​​
그렇다고 일본인들의 쌀 소비량이 한국인보다 높은 것도 아니다. 최근의 통계를 보면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60~70㎏ 정도로 쌀 소비가 급격히 줄어들기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매한가지인데, 우리보다 쌀밥에 대한 애정은 훨씬 크다는 느낌이 든다.

다양한 쌀 품종의 개발, 품질에 대한 추구, 쌀의 브랜딩화가 월등한 것도 사실이다. 앞서 말한 국산 품종인 ‘골든퀸 3호’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 유통되는 고급 쌀 품종은 거의 대부분 일본 고급 품종인 ‘고시히카리’나 ‘히토메보레’ 같은 품종이 대부분이었으니 말이다. 

2013년에는 일본의 중견 패션 회사인 사자비리그가 ‘아코메야’라는 쌀 편집숍을 콘셉트로 한 라이프스타일 잡화점 브랜드를 론칭해서 큰 시선을 끌었다. 

이곳에서는 일본 각지의 유명 쌀 품종을 골라서 원하는 도정률로 구매할 수가 있고, 심지어 더 개성적인 밥맛을 위해 여러 품종을 블렌딩해서 살 수도 있게 해 놓았다. 이것은 마치 스페셜티 커피 원두를 판매하는 것과 같다. 

포장 단위도 300g과 450g 두 가지로 진공포장으로 판다. 대략 2~4인 가족이 한 끼 맛보기 좋은 양이다. 진공 포장이라서 시간이 지나도 맛의 변화가 적다. 전체적인 쌀 소비량은 줄고 있지만 이렇게 소비의 질을 높여 나가는구나 싶다.  

1ac764dbaa8d3f27d666033fa01e9404_1619328333_2901.jpg
<아코메야​ photo publy>

밥맛을 논할 수 없었던 그때 그 시절
우리나라 사람들도 밥을 사랑하는 민족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밥의 맛, 그러니까 쌀 자체의 맛에 집중하는 문화가 거의 뿌리내리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밥맛을 논하는 것은 사치였던 우리의 굴곡진 역사 때문일 것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쌀밥은 귀한 음식이었다. 조선 시대까지 올라갈 것도 없이, 한창 개발도상 국가였던 시기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윤기가 좌르륵 흐르는 기름진 흰 쌀밥을 배불리 먹는 것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70년대에 경제 상황이 나아지며 마음껏 쌀밥을 먹나 싶었지만 여전히 낮은 쌀 생산량 때문에 정부는 쌀 소비를 억제하기 위한 여러 가지 강제 조치를 취했다.

쌀의 수요를 대체하기 위한 혼분식 장려운동은 물론이고 무미일(쌀을 안 먹는 날)을 지정한다든지 쌀을 사용한 술의 제조를 금지하기까지 했다(그래서 여전히 우리나라의 희석식 소주의 재료는 쌀이 아니다!). 심지어 학생들의 도시락을 검사하는 일도 있었다. 

흰 쌀밥을 싸 온 것이 걸리면 점수가 깎이고 체벌을 당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지금 한국의 밥 문화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바로 식당에서 사용하는 밥그릇을 정부가 지정한 것이 아닐까 한다.

1976년 정부는 백미의 수요를 줄이기 위해, 식당에서 쓰는 그릇의 사이즈를 지름 10.5㎝에 높이는 6㎝로 지정하고, 밥은 5분의 4만큼만 담을 것이라는 규격을 만들고 이를 어기면 식당의 허가를 취소하는 강력한 조치를 시행했다.

식당들은 처음에는 반발했겠지만 이내 뚜껑 달린 스테인리스 공깃밥의 효율성에 적응했다. 이것이 지금도 우리가 식당에서 먹는 공깃밥의 탄생 배경이다. 미리 퍼 놓고 온장고에 넣어 놓은 몇 시간이 지난 밥이 맛이 있을 리가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야만적인 조치일 수도 있지만 당시의 국민들은 별 불만 없이 이런 조치를 따랐던 것 같다. 쌀밥을 먹을 수 있고 반찬이 맛있으면 됐지, 밥맛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담론이 나올 상황은 아니었으리라. 

혼분식을 강요당하면서 자란 우리 선배님과 부모님 세대들이 진짜 맛있는 쌀밥 맛을 경험할 기회를 정부에 의해 박탈당하다시피 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더구나 좋은 밥맛에 눈을 뜨기도 전에 우리의 식생활은 급격히 서구화되고, 건강에 대한 관심도 커지며 쌀의 수요는 급격히 줄기 시작했다. 

흰 쌀밥은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촌스러운 것이 됐다. 쌀소비를 장려해도 쌀을 소비하지 않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어쩌면 흰 쌀밥의 맛을 양껏 즐기고 먹기도 전에 수요 자체가 없어져 버린 셈이다. 

쌀 품종 및 품질 관리 시작
우리나라의 쌀 생산과 유통의 구조도 쌀의 품질 향상을 통해 밥맛을 추구하는 것과는 좀 거리가 멀었다. 1991년 정부는 쌀 농가를 돕고 쌀 생산의 효율화를 추구한다는 취지로 각 지역에 미곡종합처리장이라는 시설을 만들고 이를 통해 쌀의 모든 도정과 출고가 이루어지도록 했다.

이 시설에는 구체적인 산지나 단일 품종의 쌀이 별도로 관리될 수 있는 구조가 애초에 없었다. 별도 관리가 안 되니 여러 농가의 쌀들이 섞이고 당연히 품종도 품질도 제각각인 쌀들이 한데 섞여 나간다. 

일본처럼 맛을 위해 블렌딩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그런 취지와는 아예 거리가 멀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보니 한때는 묶은 쌀이나 값싼 수입쌀도 마구 섞어서 햅쌀처럼 팔렸다. 이것이 금지된 것이 불과 2015년이다. 이천쌀이 맛있다고는 하지만 언제 도정을 했는지, 정말 이천에서 나온 쌀인지, 그리고 품종은 무엇인지도 모르는 쌀을 우리는 그냥 먹어왔다.  

쌀 품질을 관리하는 기준이 성립되고 지켜지게 된 것도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다. 쌀을 탈곡하고 도정하는 과정에서 쌀알이 깨지지 않는 것을 완전미라고 하는데, 이 완전미의 비율이 높아야 밥이 맛있다. 일본은 완전미의 비율이 90%에 달한다. 우리 쌀은 대략 80% 선이라고 한다. 또 쌀의 단백질 함량이 낮아야 더 맛있고 최근에 도정한 것일수록 맛있다. 

이런 모든 조건을 관리하고 품질을 등급체계로 관리하려는 시도는 2011년에서야 비로소 시작됐다. 농식품부는 양곡표시제를 통해서 쌀의 등급을 표시하도록 했지만 이는 권고사항이었기 때문에 잘 시행되지 않았다.

2018년에야 비로소 쌀 등급 표시를 의무화하기 시작하면서 쌀의 품종이나 품질을 소비자가 보고 골라서 살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쌀농사를 짓고 밥을 먹어 온 역사는 몇천 년이 넘었지만 품종과 품질을 관리한 것은 놀랍게도 불과 3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셈이다.  

뭐니 뭐니 해도 밥심
다행히 변화의 움직임은 긍정적이다. 쌀 포장지 뒷면에 표기된 품질 정보를 꼼꼼히 체크하는 소비자들도 늘어나는 것 같다. 골든퀸, 영호진미, 삼광, 백진주 같은 프리미엄 국산 품종도 개발되고 보급되기 시작하는 것도 정말 반갑다. 

‘이천미감’이라는 브랜드는 고급 단일 품종의 쌀을 정기적으로 도정해서 소량 진공포장해서 판매한다.
 ‘동네정미소’라는 식당을 겸하는 쌀 편집숍도 생겼다. 일본의 ‘아코메야’처럼 여러 가지 품종을 바로 도정해서 소량 구매할 수 있고 식당에서는 백반 정식을 먹을 수 있다. 

최근 핫한 레스토랑에서는 각종 제철 재료를 쌀 위에 넣고 지은 솥밥을 내는 등 맛있는 밥을 주인공으로 한 메뉴를 내는 곳도 늘고 있다. 가정에서는 무쇠 주물이나 도기로 된 작은 밥솥을 쓰는 집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제는 어차피 밥을 많이 지어 두고 매 끼니 먹지 않으니 한 끼 분량의 밥을 좀 더 맛있게 지어먹기 위해서는 그때그때 하는 솥밥이 더 낫다. 

누룽지를 만들어 먹기도 좋다. 잘 지으면 전기밥솥보다 밥맛도 훨씬 좋다. 아주 아주 반갑고 즐거운 변화다. 갓 지은 하얀 쌀밥이 끝내주게 맛있으면 대단한 반찬도 필요 없지 않은가. 한국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미식 행위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즐거움일 것이다. 

조금 시간은 걸리겠지만 이 움직임이 유행을 넘어서 국룰로 정착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면 아무 식당에서나 맛 좋은 쌀밥을 먹을 수 있는 행복을 누릴 수 있으니까. 한국인은 뭐니 뭐니 해도 밥심 아닌가. 밥이 맛있으면 힘도 더 잘날 거다. ​

 

경력사항

  • 現 (주)코넥스솔루션 대표이사
  • 現 (주)유니페어 이사
  • 現 (주)링크인터내셔널 이사
  • youtube=풋티지브라더스(Footage Brothers)

FSP 연재

POST
STAND
(주)다음앤큐큐

인터뷰

패션포스트 매거진

57호 57호 구독신청 목차 지난호보기

접속자집계

오늘
2,533
어제
2,791
최대
14,381
전체
1,671,596

㈜패션포스트 서울특별시 강서구 공항대로 213 마곡보타닉파크타워 2 1217호
TEL 02-2135-1881    FAX 02-855-5511    대표 이채연    사업자등록번호 866-87-01036    등록번호 서울 다50547
COPYRIGHT © 2019 FASHION POST ALL RIGHTS RESERVED.